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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속 난자와 정자, 우연 아니었다"...클림트 작품에서 발견한 생명의 흔적
황금빛으로 뒤덮인 채 입맞춤을 하는 남녀, 보는 이에게 황홀함이 전해지는 작품이다. 1907년 제작된 이 그림은 오스트리아 '금빛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걸작 '키스(the kiss)'다. 평론가들은 이 그림을 보고 그리스신화 속 오르페우스와 아프로디테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 발생과 생명의 순환 과정이 담겨 있다. 이는 19세기 말 의학과 생물학의 한 갈래인 발생학의 발전이 예술 속에 녹아든 결과다.
클림트의 여러 작품을 분석하며, 의학과 예술이 만나는 지점을 추적해온 교수가 있다. 유임주 교수(고려대 의과대학 해부학교실)다. 클림트의 '키스'를 처음 접했을 때 "그림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계란 모양의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고 설명했다. 사람을 그린 작품인 만큼 실제 계란이 아니라 난자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고, 그 질문이 연구의 출발점이 됐다. 7월 11일 열린 제43차 대한의사협회 종합학술대회에서 유 교수와 마르쿠스 뮐러 총장(빈 의과대학)은 클림트의 작품에 담긴 의학적 의미를 자세히 풀어냈다.
현미경이 바꾼 생명의 이해...19세기, 의학과 예술이 만나다
과학의 개념은 오랜 시간 수학적으로 기초된 물리학에 제한돼 있었다. 물리학자 뷔퐁이 유기체에 대해 연구를 시작하자, 생물 연구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19세기 후반, 현미경 기술의 발전과 함께 세포학(cytology)과 발생학(embryology) 기틀이 마련됐다. 과학자들은 세포가 생명의 기본 단위라는 사실을 밝히기 시작했고, 정자와 난자가 수정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는 과정도 차례로 규명됐다. 독일 발생학자 오스카 헤르트비히(oskar hertwig)는 1875년 성게의 수정 과정을 관찰하며 정자와 난자의 핵이 결합(수정)하면서 새 생명이 탄생하며 그 과정엔 각각 하나의 정자와 난자만 관여한다는 과학적 사실을 최초로 증명했다.
당시 빈 의과대학을 중심으로 의학이 크게 발전했고, 클림트 역시 의학자들과 활발히 교류했다. 어느 날 우연히 해부학 실습실을 방문한 클림트는 에밀 주커칸들(emil zuckerkandl) 교수가 진행하는 '예술인을 위한 해부학 강의'를 듣게 된다. 주커칸들 교수는 인체의 육안적 구조와 현미경으로 관찰되는 조직의 사진을 랜턴(환등기) 슬라이드를 통해 소개했고, 정자와 난자로부터 발달하는 인간 발생의 신비에 대한 강의를 진행했다. 강의에 감명을 받은 클림트는 해부학, 발생학, 조직학에서 표출된 이미지에 깊은 관심을 갖고 이를 자신의 그림 속 중요한 재료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장식인 줄 알았다"...작은 문양 하나에서 시작된 연구
그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키스 속 문양을 장식으로 받아 들여왔다. 하지만, 해부학을 연구하는 유임주 교수의 눈에는 생명과 세포 성장, 난자 등 발생학적 요소들이 반복적으로 보였다. 이러한 관찰을 바탕으로 유 교수는 "클림트는 아름다운 표현 아래 '생명의 구조'를 숨겨 놓은 것이 아닐까"라는 가설을 세우게 됐다.
유 교수는 세포학과 발생학이 도약을 이룬 시대적 배경이 클림트의 작품 세계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해석했다. 실제 클림트는 주커칸들 교수의 강의를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의 그림에 정자와 난자, 착상, 임신, 세포분열을 상징하는 요소를 빼곡히 새겨 넣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클림트의 서재에서 독일권에서 많이 보급됐던 백과사전(meyers großes konversations-lexikon)이 발견되기도 했다. 백과사전에는 적혈구를 포함한 혈구세포의 칼라 그림들이 많이 담겨 있었는데, 클림트가 이러한 그림을 참조했다는 것이다.
'키스' 속 적혈구와 난자...사랑 뒤에 숨겨진 인간 발생 '3일의 과정'
두 남녀가 애절한 키스를 나누고 있는 작품 '키스'를 자세히 보면, 남성의 외투에는 무채색의 직사각형들이, 여성의 옷에는 빨간색, 보라색의 원형과 타원형의 문양이 그려져 있다. 유임주 교수의 해석에 따르면, 클림트는 세로의 직사각형을 남성의 성기로, 원형과 타원형의 문양을 난자와 세포로 표현했다. 옷자락에는 둥근 원형 문양이 반복되는데, 이는 난자를 연상시킨다. 여성 무릎에 그려진 혈구 세포는 생리혈로 봤다. 생리혈은 여성이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나이대임을 의미한다.
유 교수는 그림 속 색채의 변화에도 의미를 부여했다. 작품 속 대부분의 원형 문양은 푸른색으로 표현돼 있지만, 유독 하나만 주황색으로 강조돼 있다. 그는 이를 수정 전 난자와 수정 후 난자를 구분한 것으로 해석했다. 이어 수정란이 두 개, 네 개, 여덟 개의 세포로 나뉘는 초기 분할 과정을 거쳐 오디배(morula)에 이르는 모습까지 상징적으로 표현돼 있다고 설명했다. 유 교수는 이러한 분석을 종합해 "그림 속 다양한 형태의 장식이 정자와 난자 등 생물학적 형상과 닮았다"며 " '키스' 작품은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란을 이루고, 이것이 세포분열을 해 '오디배'에 이르는 인간 발생 첫 3일 동안의 과정을 의학적으로 담아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작품을 '사랑의 상징'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당시 발생학의 성과를 예술적 언어로 시각화한 결과물이라는 관점에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오디배(morula): 수정란이 세포분열한 이후 16개 세포 덩어리로 구성된 초기 배아 상태. 뽕나무 열매인 오디와 생김새가 비슷해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
'다나에'에 이어진 생명의 이야기... 수정란은 어떻게 자라나는가
'키스'에서 인간 발생 초기 과정을 발견한 유임주 교수의 시선은 클림트의 또 다른 명작 '다나에(danaë)'로 이어졌다. 이 작품은 대중에게는 비교적 낯설지만,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한 클림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아르고스의 공주 다나에는 아버지 아크리시오스로부터 탑에 갇힌다. '외손자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신탁을 들은 아버지가 딸이 아이를 낳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제우스는 황금빛 비(黃金雨)의 모습으로 탑 안으로 들어와 다나에와 만나게 되고, 두 사람 사이에서 훗날 영웅 페르세우스가 태어난다. 클림트는 이 신화 속 한 장면을 특유의 황금빛 색채와 상징적인 문양으로 표현했다.
유 교수는 이 작품에서도 단순한 장식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해석했다. 유 교수는 먼저 화면을 가득 채운 황금빛 비에 주목했다. 신화에서는 제우스가 황금비의 모습으로 다나에에게 다가오지만, 그는 그림 속 황금빛 입자들이 단순히 신화를 묘사한 장치만은 아닐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황금빛 사이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작은 원형 구조와 형태를 수정 과정과 연결해 해석했다. 난자와 정자가 만나 수정이 이뤄지고, 수정란은 끊임없이 세포 분열을 반복하면서 새로운 생명으로 성장한다. 유 교수는 작품 속 원형 문양들이 이러한 발생 과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고 분석했다. 특히 그림 속 일부 구조가 수정란이 여러 차례 세포 분열을 거친 뒤 형성되는 초기 배아와 닮아 있다고 설명했다.
수정 직후 하나의 세포였던 수정란은 두 개, 네 개, 여덟 개의 세포로 나뉘며 성장하고, 이후 수십 개의 세포가 모여 하나의 공 모양 구조를 이루게 된다. 다시 내부에 공간이 생기면서 자궁에 착상할 준비를 마친 포배(배반포, blastocyst) 단계에 이른다. 마르쿠스 뮐러 빈 의대 총장은 유 교수의 설명에 이어 "'다나에'가 바로 이러한 인간 발생 약 5~7일 무렵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담아냈다"고 덧붙였다.
생명의 탄생을 예술로 그리다...클림트가 남긴 '생명의 언어'
클림트의 '키스'에는 두 남녀가 키스를 하며 하나가 되는 순간이 담겨 있다. 이는 수정란의 탄생을 의미하며, 여성의 발아래 피어나는 꽃들은 세포분열을 거듭해 생명이 시작되는 오디배 과정을 나타낸다. '다나에'에서는 수정란이 배아로 성장해 자궁에 착상하기 직전까지의 단계가 이어진다. 유임주 교수는 '키스'와 '다나에'를 각각 독립된 작품으로 보기보다 인간이 태어나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을 그려낸 '연작'으로 바라봤다. 두 작품은 서로 다른 그림이 아니라, 생명이 탄생하는 과정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연결해 보여주는 하나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의학계는 왜 클림트 작품을 거부했나"... 120년 만에 밝혀진 작품 속 진짜 메시지
기자와 사전 화상 인터뷰를 진행했던 뮐러 총장의 강연이 유임주 교수 강연에 앞서 진행됐다. 뮐러 총장은 클림트가 단순히 신화나 상징 속 인물을 그린게 아니라, 의학 연구를 작품에 녹여냈다고 설명했다. 실제 작품 속 인물들은 노인과 병든 사람, 장애를 가진 사람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이 한 줄기로 이어지며 삶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보여준다.
현미경과 의학 강의를 계기로 의학 분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클림트는 1900년대 초, '메디슨(medicine)'이란 작품을 공개한 바 있다. 인간의 삶과 죽음, 질병을 정면으로 다룬 이 작품은 당시 빈 의과대학 교수진의 거센 반발을 일으키며 결국 대학에 걸리지 못했다. 논란의 중심에 섰던 '메디슨'은 제2차 세계대전 말인 1945년 성에 보관돼 있던 다른 작품들과 함께 화재로 소실됐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흑백 사진뿐이다. 그러나 최근 오스트리아 갤러리와 연구진은 여러 차례의 반복 학습을 거쳐 작품의 ai 복원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현재 공개된 복원 이미지는 다수의 클림트 연구자들로부터 실제 작품과 가장 가까운 모습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뮐러 총장은 "메디슨은 예술을 넘어 인간과 생명, 그리고 의학의 본질을 탐구한 결과물"이라고 평가했다. 클림트는 작품을 통해 탄생과 노화, 질병과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삶의 과정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예술과 의학은 서로 다른 분야처럼 보이지만, 결국 인간과 생명을 이해하려는 공통된 질문에서 출발했을지도 모른다.
☞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오스트리아의 상징주의 화가. 황금으로 사랑을 묘사한 화가로 알려져 있다. 반짝이는 금박과 복잡한 패턴이 특징인 장식적인 회화, 벽화, 스케치로 유명하다. 1900년경 빈 대학의 의뢰로 제작한 <철학>, <의학>, <법학> 등에서 적나라한 인간의 고통과 생명의 기원을 성적으로 묘사했는데, 당시 교수진에게 거센 비판을 받고 작품이 철회되기도 했다.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상징주의와 빈 분리파를 이끈 선구자로 재평가되며, 현대 미술의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대한의사협회(회장 김택우)는 7월 10일부터 12일까지 사흘간 서울 강남구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에서 '2026년 제43차 종합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의사의 전문성으로 여는 지속가능한 미래의료: 인공지능(ai)과 초고령화 시대를 재설계하다'를 주제로 진행됐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7년 만에 오프라인으로 열린 이번 대회는 회원 간 학술 교류와 소통을 회복하는 계기가 됐다.